Chaplain Emil Kapaun was like “a grain of wheat falling to the ground.” He died willingly for the wounded during the Korean War.
“Unless a grain of wheat falls to the ground and dies, it
remains just a grain of wheat; but if it dies, it produces much fruit. Whoever
loves his life loses it, and whoever hates his life in this world will preserve
it for eternal life.” (John 12:24-25)
At present, according to the statistics of the Korea Armed
Forces, about 599,000 soldiers are on active duty. Among them, 87,093 soldiers
are Catholics, and about 30,000 young people are baptized as Catholics during
military service every year.
“Military Ordinariate,” one of 16 dioceses in Korea, was
founded in 1951 with the help of 11 military priests. It was officially
established in 1983 and elevated in 1989. Now in Military Ordinariate, about 50
religious sisters and 104 priests are serving in 95 military parishes and 116
secondary stations.
Emil Joseph Kapaun (1916-51) was born in a farm village in
Pilsen, Kansas, was ordained as a priest in 1940, and was sent to Korea as a
U.S. Army chaplain in July 1950.
He first experienced the duty as a chaplain in the Burma
Theater of World War II, and then he was sent again to Korea as a chaplain. He
is now called “Jesus of the Korean War.”
In 1993, he was proclaimed as a “Servant of God,” the first
step before bea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thanks to his extraordinary heroic
action, patriotism, selfless service, and indomitable spirit.
He was buried in the National Memorial Cemetery of the Pacific
in Honolulu, Hawaii, but his remains were identified only 70 years after his
death.
He had several chances to escape from the frontline but he
volunteered to stay together with the wounded. So, he took care of them in a
trench made of logs and straws. He even made an altar on a jeep to celebrate
Mass and prayed for the eternal peace of dying soldiers.
During the battle of Unsan, he served with the Third Battalion
of the 8th Cavalry Regiment. Against Chinese communist forces, he exposed
himself to enemy fire to recover wounded soldiers and dragged them to safety.
He was captured and held at the Byeokdong war camp where he
dedicated himself to his fellow captives. He washed the clothes of the wounded
and even stole food and medicine from the enemy’s storage to share with his
colleagues.
He passed away on May 23, 1951, at the age of 35, due to a
combination of factors including a blood clot, dysentery and pneumonia. He was
posthumously bestowed the “Army medal of honor” in April 2013.
Our late Cardinal Jeong Jin-seok was much inspired by his
example during his seminarian life and translated “Chaplain Kapaun” in 1956.
Prayer for the Intercession of Father Kapaun reads as follows:
“Father Emil Kapaun gave glory to God to the priesthood and thus serving the
people of Kansas and those in the military. Father Kapaun, I ask your
intercession not only for these needs which I mention now … but that I too may
follow your example of service to God and my neighbor. For the gifts of courage
in battle and perseverance.”
https://www.koreatimes.co.kr/www/opinion/2021/08/162_314527.html
The Korea Times/ Thoughts of the Times/ August 29 (online), 30 (offline), 2021
종군 신부 에밀 카폰
종군 신부 에밀 카폰은 “땅에 떨어진 밀알 하나”와 같았다. 그는 한국 전쟁 가운데 부상병들을 위해 기꺼이 죽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4-25)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통계에 따르면 5십9만9천여 명의 군인들이 현역으로 복무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8만7천93명이 가톨릭이며, 3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해마다 군 복무 중에 가톨릭 신자로 세례를 받는다.
한국에 있는 16개 교구 가운데 하나인 ‘군종교구’는 11명의 군종 사제들의 도움으로 1951년에 창설되었고 1983년에 정식 인준을 받았으며 1989년에 승격되었다. 현재 군종교구에는 95개의 군인 성당과 116개의 공소에서 50여 명의 수녀들과 104여 명의 사제들이 사목하고 있다.
에밀 조셉 카폰(1916-1951)은 캔자스주 필슨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940년 사제품을 받았고, 1950년 7월 미군 종군 신부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버마 미군 기지에서 처음으로 종군 신부로서 사목 체험을 한 다음 다시 종군 신부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그는 지금 ‘한국전의 예수’라 불린다.
1993년, 그는 남다른 영웅적 행동과 애국심, 사심 없는 봉사, 불굴의 정신으로 시복식과 시성식의 첫 단계인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하와이주 호놀룰루에 있는 국립 태평양 묘지에 안장되었지만 그의 유해는 그가 선종한 지 70년 만에 비로소 확인되었다.
그는 최전선에서 탈출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부상병과 함께 남아 있기로 자원했고, 통나무와 지푸라기로 참호를 만들어 부상병을 돌보았다. 그는 심지어 지프차 위에 제단을 만들어 미사를 집전했고 죽어가는 병사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했다.
운산 전투에서 그는 제8기병연대 제3대대에서 복무했다. 중공군에 저항한 그는 적군의 포위 공격을 받으며 부상병을 구출하여 안전한 곳에 대피시켰다.
그는 벽동 수용소에 끌려 가 있으면서도 동료 포로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부상병의 옷을 대신 빨아주었고, 심지어 적군 저장고에서 음식과 약을 훔쳐 동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는 1951년 5월 23일 35살의 나이에 혈전, 이질, 폐렴 등 여러 가지 복합적 요인으로 세상을 떠났고, 2013년 4월 사후에 부여된 ‘명예 무공 훈장’을 받았다.
고 정진석 추기경은 신학생 시절에 그의 모범에서 많은 영감을 받아 1956년 “종군 신부 카폰”을 번역했다.
카폰 신부의 전구를 청하는 기도는 다음과 같다. “에밀 카폰 신부님은 사제직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고, 캔자스주 사람들과 군인들을 위해 봉사하셨습니다. 카폰 신부님, 제가 지금 말씀 드리는 여러 가지 필요를 위해 …… 신부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저 또한 신부님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과 제 이웃을 위해 봉사하게 하소서. 전투에서 보여주신 용기와 인내의 은총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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